<강대의 칼럼>おもいやり지장(地藏菩薩)상(像)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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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쓰거나 취재를 하는 경우가 많아 다큐식 장문의 글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다. 오늘은 기가 막힌 일본 내의 표지석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름하여 <<おもいやり地藏像 >>이라는 표지석이다. 이 표지석에는 수은강항이 어떻게 피로인(被擄人)되어 와 처음 도착한 왜의 땅 오랑 경운사 앞 굉천(肱川) 장빈(長浜)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이후 옥수수죽을 왜의 농부로부터 받아 마시고 “왜의 땅에도 지성인(至誠人)이 살고 있구나”하며 처음으로 사람 사는 땅임을 인정하는 글귀가 눈에 띈다.
그 옛날 강항이 왜의 땅에 첫발을 딛게 된 과정을 정리해 400여년전 그 농부의 후손에 의해 표지석을 장빈(長浜)에 1992년 3월에 세워 기록을 남겼다. 2022년도 강항로드탐방단 38명(1600년 5월 19일 강항선생께서 피로인 38명을 데리고 귀국한 숫자와 맞춤)을 구성해 11월 18일 이곳 장빈(長浜)에 건립된 <<おもいやり地藏像 >>을 ㅅㄴ기하게 바라보면서 사토 신치로 회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2017년 정유재란 420주년, 2018년 강항서거 400주년을 기억하십니까?!
그러고 보면 올해로 강항 서거 405년전 일이요 1992년이라면 강항서거 374년만에 세웠다고 본다.
정유재란 칠갑(420주년) 행사가 2017년에 국민 일부만이 기억하고 넘어가고 말았지만 강항선생 서거 400주년을 맞이해서 수은강항선생 기념사업회에서는 당시 무라카미 쓰네오 수은강항섡생 일본연구회장 일행을 초청해 <<2018년 수은 강항선생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당시 무라카미 쓰네오회장은 내산서원을 방문해 용계사에서 헌성을 하고 1990년대 마스터 오즈시장과 오즈교육장이 방문해 기념 식수한 나무를 일일이 살펴보고 수은선생의 묘소를 찾아 지극정성으로 큰절을 올리고 봉향한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있다.
아마 무라카미 회장의 영향으로 그 다음해인 2019년도에는 일본의 정치·사회학적으로 큰 변화가 왔다. 레이와(令和 れいわ)시대로 나루히토가 5월 1일에 일본의 제126대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레이와 원년으로 개원했다.
일본연구회에서도 역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연구회 소속의 사토신치로 회장 일행이 레이와 원년에 맞춰 400+1주년으로 일본내에서 강항 위령제를 모시겠다고 선언해 실행에 옮긴 것이다.
2019년 일본 강항위령제에 기념사업회원들을 초대했지만 격이 맞지 않음을 논의하고서 도쿄내에서 한·일간 국제학술세미나를 추진하기로 했다.
2019년 5월 당시 1차 탐방단이 나서서 오즈시에서 사토회장 일행을 만나고 오사카를 거쳐 도쿄의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에 가 강항휘초 16종 21책을 확인하였고 오즈시를 거쳐 교토내 류코쿠 대학을 방문해 세미나 개최지로 강당을 확인했다.
이어 6월 19일 42명의 강항로드탐방단이 구성되어 일본 교토 류코쿠(용곡)대학 21`호관 101호실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일간 역사적 인물인 수은 강항선생의 국제학술세미나를 오사카 재일교포가 대거 참석한 가운데 120여명이 운집해 성황을 이뤘다.
당시 교토에서 대형버스로 고베시까지 이동하였고 숙박을 하고 그 다음날 오즈시민회관으로 이동했다. 20여명의 유림들은 추모제를 거행해야 한다며 며칠전 일본연구회에서 거행한 위령제를 뒤로 하고 정성껏 추모행사로 진행했다.
이후 11월 11일에 사토신치로 회장일행을 초대해 400+1주년 기념으로 강항선생 서거이후 처음으로 내산서원에서 추향제를 모셨다. 당시 초헌관으로 이개호 3선국회의원, 아헌관으로는 이장석 전남도의원, 종헌관으로 강성휘 전 전남도의원이 새로 지은 제례복으로 갈아 입고서 정성을 다했다.
이어 오후 2시부터 영광문화예술의 전당 공연장에서 개최된 국제학술세미나는 "간양록'과 '강감회요'목판각 등 도지정문화재 288호를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받고자 개최했다.
<<おもいやり地藏像 >>재조명
이러한 노력들의 결실로 1597년 이후 칠갑(420년)이 흐른 지금 도도다카도라(등당고호)의 후손인 사토신치로 회장과 수은 강항의 후손이 다시 모여 역사의 선순환을 가져오는 것 같아 한·일간 민간교류의 물꼬가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으로 본다.
<<간양록>>에 의하면 당시 왜인들의 수준이 1%의 식자층에 90%가 무지랭이라고 혹평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おもいやり地藏像 >>의 서문을 보면 경장 2년(1597년)풍신수길에 의해 등당고호군이 강항을 포로로 끌고 왔음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표지석에서는 수은 강항이 등원성와 즉 순수좌를 통해 일본에 유교를 전파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일본 유학의 시조임을 증명하고 있다.
유교와 유학은 엄격히 말하면 다르다. 유교는 종교라 말할 수 없지만 엄격한 룰이 있다. 그 첫째가 유학(신유학)문이다. 두 번째가 심의이고 세 번째가 제례문화와 공자묘의 전파이다.
그런데 이들의 글에서 유교와 유학을 함께 말한다. 그만큼 강항이 그들에게 전파한 것은 유교와 유학이라는 것을 둘둘말아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장 선인(先人)의 마음을 깊이 있게 헤아릴 수 있는 시(詩)를 표지석에 한문과 함께 일본어와 병기를 해 놓아 찾는 이들에게 한껏 배려를 해 놓은 것이다. 그건 일본인들을 대표할만한 기본마음인 <<おもいやり >>동정 가득한 마음씀씀이의 발로이다.
경화요초부지명(瓊花瑤草不知名)시 해석
특히 <<おもいやり地藏像 >>에 남아있는 경화요초부지명(瓊花瑤草不知名)의 칠언율시(七言律詩)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시란 시인의 것이 아니라 그 독자의 것이라는 말이 새삼 무게있게 다가왔다. 일본 출석사 스님의 해석과 국문학자, 강항연구가, 한문학연구가, 일본연구가 등이 풀이한 글을 공개함으로 수은선생의 학문적 깊이를 느껴보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참고로 경화요초부지명(瓊花瑤草不知名)시는 강항이 1598년에 교토 후시미성에서 뛰어난 유학자로 소문이 나 무수하게 많은 왜인들이 찾아와 시와 글 그리고 그림을 부탁했던 시점이다.
특히 1598년 봄 어느날 왜승(倭僧) 가고(加古)가 기화(琪花)ㆍ요초(瑤草)가 그려진 병풍을 들고 와 병풍폭에 맞는 화제(話題)시(詩)를 청탁해 와 수은 강항이 당시 병풍에 쓴 칠언율시이다.
1. 이름 모를 예쁜 꽃과 고운 풀이여 瓊花瑤草不知名(경화요초부지명)
구십일 봄빛에 분수 밖의 영화로다 九十春光律外榮(구십춘광률외영)
누각 앞 밝은 달을 부치는 듯하니 明月樓前如可寄(명월루전여가기)
그대는 응당 먼 곳 사람 마음 알리 美人應識遠人情(미인응식원인정)
2. 이름 모를 예쁜 꽃과 고운 풀이여 구십일의 봄빛에 뜻밖의 광영의 빛으로 온누리를 비추이지 않는가??!! 이는 누정 앞 밝은 달빛이 훤하게 비추는 것과 같으니
(흡사 이름없는 꽃과 풀도 이렇게 애닮게 비추는데) 어련히 먼 곳에서 온 나의 애닮은 마음을 (그나마) 그대(왜승(倭僧) 가고(加古))는 헤아릴 수 있지 않겠는가??
3. 고운꽃 아름다운 풀은 이름을 알지 못하나 구십일 간의 봄빛으로 법률 밖의 영광이로다. 밝은 달이 비추는 누각앞에서 마치 나의 마음을 부치나니 사랑하는 그대여, 응당 멀리 있는 사람의 뜻을 알리요.
4. こういう解釈もでき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ものに次の文はいかがでしょう?
瓊の花、瑤の草、名を知らず 九十の春光、法外の栄光 明るい月の前で、言葉に託せば 美しい人よ、遠くの人の情を理解せよ
→見知らぬ名もなき美しい花々や瑞々しい草たち 九十回目の春の陽光は常識を超えた栄光を 放っている 明るい月の下、その光景に心を託せば 美しい人よ、遠く離れた人の思いを理解し よう そのものを解釈した記事は簡単には見つかりませんね、また調べてみます。
5. 이름모를 꽃과 풀들은 바람에 흔들리지만 90일간의 봄볕은 흐트러짐없이 빛나네 정자 앞을 비추는 저 달빛을 보내면 멀리계신 그님은 이 마음 알아주실까
<편집자 주>
<<おもいやり地藏像 >>
おもいやり[思いやり·思い遣り]1.동정함;동정심 2.상상;헤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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