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 강항의 종오소호【從吾所好】정신 계승 사업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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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7일 일본 에히메현 오즈시민회관에서 환국해 국내로 들어온 종오소호【從吾所好】 편액(길이 1m50cm, 너비 55cm, 무게중량 27kg 기증식 관련임.)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 수군에 의해 피로(被擄人)된 수은 강항선생은 조선 선비 38명을 데리고 환국(還國)을 완성하기위해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일본인들에게 글을 써 줘 은화를 벌어 들여 장장 45여일의 숙식을 해결할 선박과 음식을 차곡차곡 마련해 준비했다.
이러한 치밀한 계획의 완성으로 드디어 경남 장승포구로 1600년 5월 19일(음)에 환국하였는데 지금의 금화로 환산하자면 수십억원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또,
이 은화벌이에 가장 즐겨 쓰신 종오소호【從吾所好】와 난방(蘭芳)이란 글씨를 떠 올려보라!!
누구나가 한 평생을 살다보면 한번쯤은 종오소호【從吾所好】정신을 피력해 말할 수 있으며 인생에 있어서 인문학을 모르더라도 난방(蘭芳), 즉 선비의 삶의 추구란 가히 멋진 인생을 향해 가는 바로미터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당시 선생의 마음가짐을 의미심장하게 내포하고 있는 글씨들로 결과적으로 이는 대한민국 선비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 할 것이다.
종오소호【從吾所好】의 계승사업을 위해 좀 더 깊이들어가 보자!!
종오소호【從吾所好】의 사자성어는 「論語」 제7(述而)편 11장에 나오는 글로 子日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篇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라 말했다.
이를 풀이하자면 공자께서 '부를 추구해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말채찍을 잡고 수레를 모는 일이라도 직접 시도하겠다.
하지만 그렇게 까지 해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나서서 하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채찍을 잡고 수레를 모는 것'이란 당시 시대에서 가장 천박한 사람의 일이었다.
이에 공자의 가르침을 후대에서 일부 식자층에서 풀이하기도 했다.
<소찌> 왈 성인이 일찍이 부를 구함에 마음을 두신 적이 없으니, 어찌 가능함과 불가능함을 따지셨겠는가.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다만 결코 구해서 될 수 없음을 밝히셨을 뿐이다.
이어 <양씨>가 말하였다.
`군자가 부귀를 싫어하여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달려 있어서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산 정약용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서 대화법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더 쉽게 보총해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공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서서 하겠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였으니 1597년 9월 23일 영광 염산 논잠포에서 일본 수군에 의해 피로된 수은 강항의 종오소호【從吾所好】정신을 한 번 더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당시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피로된 포로로서 이국 땅에 너희들이 내 몸뚱아리는 결박해 붙잡아 두고 매일같이 감시와 속박한다 하더라도 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너희와 생활 자체가 차별화됨이요, 너희들의 비인간적이며 흡사 동물같은 삶을 추구함을 당당하게 조롱하면서 한 수 위의 계층에서 마음껏 울분을 토로하겠노라는 뜻을 담아 수없이 피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를 증명하듯 강항의 저술서인 『간양록』< 적중봉소(賊中封疏),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고부인격(告俘人檄),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섭란사적(涉亂事迹)으로 구성>
을 들여다 보면 조선인이 일본 인보다 체격이나 신체조건이 더 좋고 무기도 뒤떨어지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다만 군의 조직과 인사제도에 맹점으로 기강이 해이되어 침략을 당했음을 조선의 왕에게도 당당하게 적중봉소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이 유교의 철학 이념과 기반으로 조성되었기에 적지에서도 가능한 일이었으며 올곧은 선비. 강항이었기에 더더욱 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강항이 결코 그러한 당당함을 멈추지 않고 오로지 강직한 선비로서의 우국충정의 대업만을 생각하면서 초개와 같은 포로의 삶을 연명하면서도 그 의미를 찾아 갈 수 있었다고 말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7월 17일 영광내산서원 광장에서 거행된 종오소호【從吾所好】기증식에서는 호남지역 유림(광주향교, 영광향교, 이흥서원 유림)들이 더거 참석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들의 참석은 고려말 삼은<三隱,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혹은 도은(陶隱) 이숭인) 등>에서 도도히 이어져 내려와 율곡 이이로부터 성수침, 성혼, 김굉필, 조광조의 학풍을 수은선생이 전수해 오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기도 했다.
종오소호【從吾所好】 편액의 제작과정과 다시 환국해 오는 과정은 펙트와 추정의 역사가 존재하며 굳이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1600년 이후, 강항이 전남 영광 불갑 운제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운둔하고 있던 중 가까운 문중에서 편액을 써 달라는 청탁으로 【從吾所好】편액을 써주게 되었다.(많은 일본인들에게도 불요불굴의 정신을 전하듯 즐겨 썼다고 구전으로 전해옴)
이후 1960년 이후에 종오소호【從吾所好】 편액을 보관하고 있던 그 문중에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처분한 관계로 인해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고문서 수집상에서 처음으로【從吾所好】편액이 발견(강한신 진주강씨사적보존회장 89세 증언)되었다.
이어 일본에서 무라카미씨쓰네오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임란포로 姜沆 발자취’의 저자, 수은강항선생일본연구회 초대회장, 강항연구가>
전 일본연구회장(88세 수은강항선생 일본연구회)은 일본인 수집상에 의해 한국에서 건너온 【從吾所好】편액을 전해 받는 꿈을 꾸고 그 다음 날인 1995년 8월에 수장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임란포로 姜沆 발자취’에 기록됨)
종오소호【從吾所好】를 말했던 공자도 당시 시대가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며 제자들과 다분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졌을 것이다. 황금만능은 그 시대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고 공자는 안과 밖으로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그런 삶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증오하지도 않았듯이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篇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라는 글로 제자들에게 인문학적 관점에서 모든 삶의 방안과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돈을 찾아나서서 돈을 구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말채찍을 잡고 수레를 모는 것' 등의 당시 시대에서 가장 천박한 사람의 일도 서슴지않고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손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공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살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사람이 불안과 우울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고 결코 즐겁지 아니하기 때문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자가 내몰린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삶을 살며 느꼈던 즐거움과 수은 강항이 적지인 일본으로부터 피로인으로 절박한 상황에서도 내몰린 삶을 피해 선비다움으로 초연하면서도 담담하게 2년 8개월을 극복해 낸 삶의 무게는 이와 다르면서도 같았으리라 생각된다.
선비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학문을 탐구했으며 절의정신으로 도학의 이룸을 즐겼다. 이처럼 옛 성현들은 정쟁에서 물러 나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삶을 추구했다. 흡사 나물먹고 물마시면서도 이쑤시는 청렴(淸廉)사상이 있다. 이처럼 물욕을 버리고 좋아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면 때론 불안하겠지만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만큼 자아의 분열만은 겪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향후 종오소호【從吾所好】정신 계승사업의 시발점이 된 2024년 7월 17일 편액 기증식은 소중한 의미를 증명해 이를 밝혔다.
이날 계승사업의 선봉대로 이낙연 제 45대 국무총리 기증자 / 김동진 대회장 / 사토 신치로 수은강항선생 일본연구회장이
최홍렬내산서원장 / 강재원내산서원보존회장 / 강대욱 성균관 부관장 / 윤홍식 동토 후손회장 / 최형주 강항문화제 추진위원회 대표에게 기증하면서 수은강항의 선비정신 계승사업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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