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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姜沆), 일본을 가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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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대의
댓글 0건 조회 468회 작성일 22-06-1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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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 전남 영광 한 마을에 신동으로 불리는 천재소년 강항이 태어났다. 3세에 사서(四書)와 오경(四書五經)을 백형 저어당(齟齬堂) 강해(姜瀣)로 부터 배우기 시작해 모르는 글이 없을 정도였다.


 불과(不過) 그로부터 2년 후인 5세 때 일이다. 백록 신응시가 신동으로 소문난 강항소년을 만나기 위해 영광 유봉마을에 들렸다. 신응시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소년 강항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의례 껏 문중어른을 인사를 나누고서는 전라감사 신응시(辛應時, 1532~1585, 백인걸의 문인)는 곧 바로 강항을 만났다. 공손히 큰절로 예를 갖추는 강항을 번쩍 들어 무릎에 앉히고 다리 각(脚)자로 명제하니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시문을 짓기 시작했다.  


 꼬마 소년 강항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더니 이내 글을 지어 답하기를“각도만리심교각(脚到萬里 心敎脚)”이라는 칠언시(七言詩)로 대답하니 신응시는 무릎위에 올려놨던 소년 강항을 경배하듯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얼굴빛을 고치고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러하듯 강항은 문장으로 이미 주위를 놀라게 하였을 정도였다. 천재소년에 대한 소문은 이 지역뿐만 아니라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신동(神童)이 영광 땅에 있노라고 서울 장안에 까지 번지고 있었다.


 7세 때 일이다. 소년 강항은 사서오경 중 맹자에 대한 궁금증으로 벌써 며칠째 책장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마침 영광 불갑면 유봉마을 근처를 지나는 책장수를 만나 대뜸 맹자 1질을 보여 달라는 당돌한 말에 책장수는 어이가 없었다.


책장수는 맹랑한 강항을 골려줄 생각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맹자에 빠져있는 소년 강항에게 내기를 걸었다. 그러나 강항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마침내 책을 한나절동안에 다 탐독(耽讀)하고나서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그냥 가려고 하는 강항을 보고‘네가 그럼 그렇지’하며 탐독한 맹자에 대해 내기를 했음을 엄하게 추궁하듯 말했다. 그러나 소년 강항은 태연하게 맹자 첫 장부터 막힘없이 술술 암송(暗誦)해 책장수에게 들려주었다.


깜짝 놀란 책장수가‘내가졌다.’며 맹자 1질을 주려고 하자 강항이‘아저씨!! 맹자 책 내용은 이미 제 머릿속에 다 들어와 있으니 다른 마을에 가서 마져 파셔요.’라며 쏜살같이 가버렸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책장수는 어른으로서 그냥 맹자 책을 가져갈 수가 없어서 소년 강항이 맹자를 읽었던 마을 정자에 맹자 1질을 걸어 놓고 갔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진주강씨 대동보와 세보에는 이를 증명하듯‘7세 맹자일독 맹자정’ 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현재 불갑면소재지에 맹자정비가 현존해 세워져 있다. 


이렇게 신동으로 알려진 강항의 8세 때의 일이다. 옛날에는 육로(陸路)보다 수로(水路)가 더 빨라 염산 논잠포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무장현 칠암포구에서 구암리로 죽곡 이장영  문하로 출입하던 중 칠암마을의 유림들로부터 신동이 이곳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강항을 불러 세웠다.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 오는 통감강목은 중국고서로 중국의 고대역사를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어 매우 어렵고 까다롭기로 소문이 난 역사서이다. 이러한 역사서를 하룻밤 만에 읽어 그 다음날 아침에 들려주니 주변에 유림들이 하나같이‘드디어 장안에 소문난 신동(神童)이 지금 우리 앞에 있노라’며 그중 연장자 유림이 이곳 칠암마을을 강목촌으로 명명한다고 전해온 일화(逸話)는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를 뒷받침하듯 강항은 16세에는 책문으로 향시에 합격하고, 21세에는 향선 3장 시험에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다. 이어 22세에는 진사시에 합격한다. 22세가 되자 이해 진주 김씨와 결혼을 하였고 안정된 가정에서 이미 과거에 합격한 맏형인 저어당 해(瀣)와 둘째 형인 퇴은공 준(濬)에 이어 과거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


 그러나 강항은 1591년 25세에 큰 화를 입고 만다. 3세에 사서오경을 가르친 백형 저어당(齟齬堂) 강해(姜瀣)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강항에 못지않은 유학자이기도 한 강해(姜瀣)를 무능한 군주 선조는 강해(姜瀣)를 매번 칭찬했다.


왕실에서 경연이 펼쳐질 때마다 선조는 만조백관 앞에서‘호남의 문장가는 강해(姜瀣)’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칭찬을 하지를 말든지 선조는 호남제일의 문장가인 강해(姜瀣)를 절대군주인 선조는 정여립사건에 연루시켜 신묘사화 연루자로 몰아 강해(姜瀣)를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강항은 이를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애상(哀傷)해 하였으며 이후 겉으로 그러한 어두운 자취를 감추면서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며 상통흠적(像痛欽迹)했다. 


특히 강해(姜瀣)는 처형되기 전에 미리 예언하듯 수은에게‘네가 인간으로 남아 있으니 그나마 네 형수를 부탁할 수 있어 적이 안심이 되는구나.’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형수마저도 정유재란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광기 어린 몰살정책인‘거느적 거리는 것은 명령 없이 모두 살육해도 좋다.’는 지시로 선상위에서 노인과 어린아이, 지아비가 없는 과부와 처첩들을 무자비하게 살육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을 때 수은 강항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형수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처지에 한없이 처참함과 지키지 못한 아픔을 평생 간직할 수밖에 없음을 간양록에 한 페이지로 남기고 있다. 


 여기서 잠깐 16세기 후반 일본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라는 인물이 오나 노부나가의 세력을 교묘하게 이어받게 된다. 천한 신분이었던 풍신수길이 깜짝 등장해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열도를 통일했다.(1591년)


통일을 달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국내의 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무사들을 모아 조선을 거쳐 명나라로 대륙출병의 야욕을 호시탐탐 불태웠다. 


 오랜 기간의 내정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조선과 명나라로 방출시키고자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일본 내의 불안정한 통일로 치안이 불안했던 왜국의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세력의 무모한 무력을 억제시키면서 조선을 넘어 중국까지도 지배하겠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빚어진 정유재란은 1597년(선조 31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차 임진년 전쟁에서 실패한 원인을 첫 번째로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여 식량을 확보하지 못한 탓으로 분석했다. 두 번째로 호남의 의병을 원인으로 꼽고“거느적 거리는 대상(노인과 부녀자, 어린이 등)은 모조리 죽여도 좋다.


다만, 먹물이 튄 선비와 기술자는 너희들 머리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기에 절대 죽이지 말고 목숨만 겨우 살려서 데려 오도록 하라.”고 밀명을 부하들에게 내렸다. 이러한 밀명 속에서 진행한 정유년 2차 전쟁에서 왜군은 전라도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어 갔으며 포로로 끌고 갔다. 이들이 벌인 정유재란은 전라도는 한순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왜의 육군은 호남의 길목인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를 거쳐 익산까지 올라갔다. 조선 수군은 6월 안골포, 7월 웅포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러나 9월 16일, 이순신은 12척의 함선으로 130척의 일본수군을 명량에서 대파함으로서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다.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떠나 고군산 군도에 머물기까지 보름 남짓한 기간 일본 수군은 전선을 정비한 뒤 곧장 조선 함대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이때 강항은 집안회의를 거쳐 30여 명의 일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이순신장군 진영으로 들어가 싸우기 위해 항해 뱃길에 올랐다.


강항은 부친인 강극검공이 탄 배와 어긋나고 뱃사공인 노비의 불찰로 칠산바다를 배회하다가 우여곡절 속에서 1597년 9월 23일 칠산 바다의 시작점인 논잠포 앞바다에서 도도 다카도라의 휘하 수군에게 피로(被擄)되고 만다.   

 

 이처럼 피로(被擄)되어서도 강항과 둘째 이씨 부인(애생이 엄마)은 참으로 모진 인연이 있어 정유재란 당시에도 가슴을 에이는 통한(痛恨)의 인연은 계속된다. 논잠포 앞바다에서 이씨 부인은 이미 예고도 없이 강항과 생이별을 했기에, 지아비와 첫째 김씨 부인 가족이 논잠포에서 순천 앞바다까지 끌려가는 내내 서로 생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한밤중 끌려가는 아비규환 속에서 이씨 부인은 강항의 식솔로부터 홀로 떨어져 저쪽 건너편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일여가 지났을까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순천 앞바다에서 애생이 엄마(이씨 부인)의 외침을 저 건너편 배편에서 처음 듣게 된 것이다.“영광사람 어디에 없소? 영광사람 어디 없소?”이날 이씨 부인의 흐느낌과 외침은 처절하다 못해 듣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타게 하는 절규의 외침이었다. 


 아니 냉기로 가득한 남해 바다를 온통 한으로 적시며 그 통곡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며 애처롭고 처절하고도 가냘프게 바람에 묻어 날려 오고 있었다. 이러했던 둘째 이씨 부인은 왜놈들의 다른 배에서 통곡을 하듯 소리를 지르다가 곡기(穀氣)를 끊고 왜놈들에 의해 맞아 죽고 만다.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왕은 무엇이며,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무엇 하러 있는가.”강항은 가족도 못 지키고 나라도 못 지키는 자신의 무력함을 원통해하면서 현해탄을 건너가는 일본군의 뱃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강항가족은 노부신치로 군대에 잡혀 전쟁의 원인이 된 대마도를 거쳐 쓰시마 섬과 이키 섬을 지나 쓰시마해협 시모노세키를 지나서 시코쿠 지방 이요의 오즈성으로 끌려갔다. 당시 왜국은 무사들이 지배하는 시대로 일반 백성은 거의 글자를 몰랐으며 권력자였던 장군들도 글을 몰라 전장에 나갈 때도 승려를 데려가 글을 써서 소통하였다. 


 이 시대에 왜의 유일한 지식인층은 승려들이었다. 승려들은 불교 경전 이외에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다. 왜의 승려들 가운데 신유학에 관심 있는 승려들이 많았으나 아직 신유학이 일본에 보급되지 않았다.


왜국의 승려들은 도의와 예의를 숭상하는 조선의 예학, 정치, 관제 등을 동경하였다. 왜의 유일한 지식인층은 승려들이었기 때문에 왜국 백성들이나 무사 권력자들은 승려를 존경하고 우대하였다. 오즈성의 장수 노부신치로는 강항이 포로가 된 이후에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의관이나 행동을 보고 대학자임을 알아보고 오즈성에 포로로 잡혀 있지만 특별히 우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강항의 실기체험문집인 간양록에 보면 오즈성에서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즈성에서 가까운 금산 출석사의 중 요시히토(호인)이란 사람은 자못 문자를 해독하였습니다.

그는 신을 보고 슬프게 여겨 예우가 남보다 더했으며 어려운 일을 도와주기도 하였지요.”학문으로 요시히토의 마음을 산 강항은 공부를 핑계로 왜국의 문헌을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요시히토는 제 나라의 사적에 관한 문헌을 서슴지 않고 보여 주었다. 강항은 이를 모조리 옮겨 베끼었다. 거기에다 자신이 직접 본 왜국의 형세와 정보, 국방대책을 임금에게 올렸다. 


 당시 왜인들은 조선의 문화와 예술을 탐하여 서적, 목판, 활자본, 공예품 등 문화재를 약탈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강항은 킨잔의 제5대 지주인 카이케이를 만나 한시(漢詩)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는데 그가 국가 기밀인 일본의 전국 지도를 은밀히 보여 주기도 했다.


 오즈성에 있던 강항이 교토 후시미성으로 옮겨간 것은 1598년 6월이다. 명량대첩에서 패퇴하고 귀국한 도도 다카토라가 교토로 귀국해 들어왔기 때문에 피노 된 강항을 보낸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귀족의 자제들 가운데 학식이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승려가 되었다. 귀족의 자녀들만이 승려가 되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것이다. 


 강항은 교토로 이송되어 일본 승려와 지식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여기에 의사인 의안과 이안이 강항을 가끔 찾아와 필답으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강항은 이러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틈만나면 조선을 향해 탈출을 감행했다. 


여기서 잠깐 강항이 왜국에 피로되었을 당시 탈출을 두 차례나 감행할 당시 풍국묘의 벽서사건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 풍국묘 벽서사건


1598년 왜국에 피로(被擄)되어 2년차에서 수은 선생의 가장 크게 분기탱천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적절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마 수은 선생이 적개심을 갖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분노(忿怒)하며 울분(鬱憤)을 마구 퍼 부었던 사건이 왜승(倭僧) 남화(南化)가 저지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죽고 나서 황금전의 어천가 사건으로 이 되먹지도 않은 글을 북북 그어버리고 쓴 유명한 벽서사건(壁書事件)일 것이다.


당시 수은 강항은 탈출을 꾀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슴지 않고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를 칭해 "왜적의 괴수 풍신수길이 죽었다. 시체를 북쪽 교외에 묻고 그 위에 황금으로 장식한 전각을 지었다.“고 그의 저서인 수은집에 기록하고 있다.


 ”왜의 승려 남화는 큰 글씨로 풍신수길의 황금전 무덤에 이렇게 썼다.  '대명 일본 천지 온 세상에 이름 떨친 호걸이 났도다. 태평한 길을 열었으니 그의 덕이 바다같이 넓고 산같이 높아라. 


이에 강항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는 그것을 보고 격분하여 붓으로 온통 먹칠해 버리고 그 옆에 이렇게 썼다.”고 전한다.


 '한평생 경영한 게 한 줌 흙 된단 말인가. 열 층의 황금 전당 부질없이 높구나. 탄알만한 네 땅 지금 남의 손에 갔느니라. 무슨 일로 청구 땅에 당돌히도 대들었나?' <수은집>


그것도 탈출을 감행하면서도 적괴(敵魁)의 우두머리가 죽은 그 풍국(豊國)묘의 황금전에 과감하게 벽서로 그 죄를 묻는 행동은 누가 봐도 혀를 내둘릴 정도의 대범하고 거침없는 기상이요, 대단히 큰 역사적 사건이다. 선비의 자세와 정신으로서 기꺼이 할 일은 하고야 만다는 대단한 결심의 작용되었다고 밖에 더 이상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강항이 오즈성에 이어 탈출을 자주 도모하자 오사카성에서 다시 1560년 일본 교토 후미성으로 이송되어 왔다. 이곳에서 강항이 만난 왜인이 숙명적으로 인연을 갖게 된 순수좌이다.


순수좌는 여섯 살이나 더 많은 왜승(倭僧) 으로 강항의 뛰어남을 필담으로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서 염치불구하고 간청하여 사제지간의 연을 맺게 되어 마침내 강항은 순수좌를 제자(弟子)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순수좌에게 강항을 소개한 왜군의 장수인 적송광통으로 막강한 군부의 실세였다.


그는 신유학에 갈증을 가진 인물로 순수좌와 막연한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로 등장하게 된다.‘당신들의 나라 왜는 철천지원수와 같은 나라이며 장군들이라는 사람들은 개, 돼지보다도 못한 놈들’이라고 이를 갈았던 강항에게 순수좌는 여느 왜인하고는 달랐다. 


 순수좌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폭정에 이미 질려 있었고 중국이나 조선이 왜국을 침략해 순수한 왜 민족을 보호해줬으면 한다는 대화를 나눈다. 이 말에 깜짝 놀란 강항은 이후부터 순수좌와 속마음을 툭 터놓고 대화를 끊임없이 갖게 되었고 순수좌의 마음을 안 강항은 성재기와 사상와기를 직접 적어 성과 와를 아호로 내려줘 마침내 등원성와(藤原惺窩) 즉 후지와라 세이카로 재탄생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후지와라 세이카(등원성와)라는 왜의 유학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후에‘일본 유교의 개조’가 된다. 이처럼 필담(筆談)을 통해 강항 휘초 16종 21책을 전수받게 되었으며 사서오경을 발문해 일본유교(日本儒敎)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이미 강항은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을 넘어 조선의 유교경전과 주자학(朱子學) 사상으로 도학(道學)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유학자로서 손색이 없는 최고의 지성의 위치에 올라와 있었다. 당시 왜국에서는 전쟁을 싫어하는 1% 식자층 부류의 승려계급인 후지와라 세이카는 왜승(倭僧)으로 신유학 사상에 잔뜩 목말라 있었으며 최고봉에 오른 강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경제 부국을 말하는 현대 일본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역사에서는 가정법이 없지만 불을 보듯 뻔한 것은 강항의 적중 봉소에 의하면 이 당시 왜놈들의 99%가 무지(無知)랭이 민족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1560년 무렵에서야 일본의 역사는,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끝나고 에도(江戶) 시대가 시작될 때를 기준으로 중세(中世)와 근세(近世)로 나뉜다. 같은 봉건시대면서 왜 시대를 나누는 것일까? 그것은 생활문화의 변화에 기인한다. 


 1560년 이전까지는 종교불교의 영향이 컸으므로 학문은 승려를 제외하면 일부 학자 또는 특권 계급만이 누릴 수 있었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유학의 전파로 인한 영향으로 종교를 배제한 합리적인 교육이 일반 대중 사이에 확산되어 사숙(私塾)과 데라고야(寺小屋)와 같은 서당에서 일반 왜인들도 봄날의 불꽃처럼 신유학이 일본열도에 거국적으로 뻗어 나갔다. 


'하늘 천 따 지...! 공자 曰, 맹자 曰….!!


 크게 소리를 내어 읽으며 무릇 교육과는 인연이 없던 일반 서민들이 처음으로 글자를 알고 학문에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척박한 사무라이 무사시대에서 기초가 다져진 신유학은 곧바로 이어지는 명치유신을 몰고 왔다. 왜인들의 근세 문화의 개막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목숨을 건 활동이 뒷받침되었다. 


 피노 된 강항은 이역만리(異域萬里) 왜놈들의 땅에서도 충효사상과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정신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바르게 정립하면서 하루도 심의(深衣)를 벗지 않고 조선선비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생활했으며 적국에서도 항상 겸손하면서 당당하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에 순수좌는 유교의 복심이랄 수 있는 심의(深衣)에 동경하게 된다. 강항이 아침과 저녁을 맞이하면서 선비로서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고 의관을 정제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한사코 심의의 제작과정에 매달리게 된다. 

 거듭 순수좌의 열정에 감동을 받은 강항은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의관의 정제기술까지 전해주게 된다.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이를 통해 일본 강호 막부 문화에 주자학을 뿌리내려준 인물로 일본 유교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으며 현대와 이를 증명하듯 일본 오즈시에서는‘홍유 강항선생 현창비’를 세워 매년 추모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을 해 2세교육의 장으로 역사에 그를 중요한 인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일본 유학의 원조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족적을 남기고 일본에서 유명한 일본인 당시 유학자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모든 일본 유교 책자에는 조선에서 정치의 근본이 된 신유학을 비롯해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모든 유학 서적들은 강항(姜沆)선생에 의해 선생이 발문(跋文)하여 선생의 머릿속의 학문만을 베껴 쓰고 그가 갖고 있는 지식이 일본의 서책(書冊)들로 만들어졌기에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의 텍스트임을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충분히 영악한 근대와 현대의 일본학자들은 이후 앞 다퉈 중국 현지의 원서(原書)와 검증해본 결과 강항이 발문한 서책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문서임을 입증하고 나서야 그의 위대함을 재삼(再三) 인정해 오즈시에 성역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유재란의 폐해(弊害)로 빚어진 왜놈들의 포로생활 중의 강항의 가르침이 곧 지금의 일본의 근대사의 지표(指標)가 되었고 일본의 진정한 근대사 유교가 되었다.


 또, 어제와 오늘의 일본에 명확하게 실사구시(實事求是)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놀랍게도 이를 발전시켜 명치유신(明治維新)과 화(化)사상으로 변화를 꾀하여 이와 같은 학문의 원동력으로 일본경제가 바로서고 사회질서가 잡혀 지금의 일본이 반듯하게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항은 당시 일본 고승들에게 경전(經典)을 써주기도 하고 성리학(性理學) 정주학을 가르쳐주는 등 조선유교의 진수를 일본에 전파함으로서 식자층의 일본인들이 지금도‘해동강부자(海東姜夫子)’라고 부르며 그를 공경(恭敬)하고 있다. 


 강항(姜沆)은 이토록 포로생활 속에서도 일본 유일의 지식층인 순수 좌 후지와라 세이카와 성주 아카마쯔 히로미치(赤松廣通)에게 유교를 전파해 근대일본이 제대로 정립되도록 했다. 이 부분도 <간양록>을 살펴보면 당시 강항은 은전을 벌어서 귀국할 배를 마련하고자 왜승 순수좌를 통해서 글씨를 팔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강항은 유교에 대한 세이카의 열의에 감탄해 그에게 신유학(강감휘초)을 가르쳐 주게 되었으며 유복(儒服) 즉 선비옷인 심의(深衣)와 예법(제례문화) 등에 대하여도 완벽하게 모든 지식을 전파(傳播)하였다. 


 현재 일본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에는 강항이 포로 생활을 하면서 쓴 책 강항 휘초가 수진본으로 소장돼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강항이 고작 3세에 통달했던 사서오경을 포함한 신유학의 기본 이론서들이다. 이중 일본 신유학의 기반을 조성한 것이 사서오경 훈점본이다. 강항이 원본을 쓰고 순수좌가 일본어로 훈을 달아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을 통해 왜인은 겨우 사서오경을 자기네들 말로 읽을 수 있었다. 결국 강항이 일본 유교의 비조로서 씨를 뿌린 것이다. 


 이처럼 강항은 간양록을 통해 “내가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다지마 성주 아까마쓰 히로미치와 순수좌 덕분이었다. 순수좌는 생활비와 돌아갈 때 쓸 비용도 마련해 주었다.


아카마쓰는 증명서를 얻어 주어 관문들을 무사히 지날 수 있게 해주었고, 순수좌는 사공 한사람을 더 붙여 주어 대마도까지 항로를 인도하게 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도움으로 1600년 5월 19일, 강항의 가족과 포로로 잡힌 선비 등 모두 38명은 꿈에도 그리던 조선에 무사히 도착했다. 강항은 온갖 고초와 수모를 감내하고 기필코 돌아왔다. 


그러나 어린 아들과 딸 조카를 잃었고 이씨 부인을 잃었고, 끌려가면서 죽고 또 일본에서 죽어간 많은 동족들을 생각하니 나라에 뽑힌 선비로서 부끄럽고 비통해 했다. 


“선비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 나라를 빼앗아 가는 도적들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선비는 왜 필요한가. 선비도 싸울 힘이 필요하구나. 글만 읽는 선비보다는 싸울 힘을 갖춘 선비가 되어야 한다.” 강항은 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하였다.   

   

 부산에 도착한 강항은 선조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서 선조로 부터 왜의 현지 상황에 대하여 물었고 강항은 자신이 파악한 것들을 정리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조정은 강항에게 대구교수를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물러나 후학 양성에 힘쓴다. 이어 순천교수를 임명하였으나 스스로를 죄인이라 칭하고 또 다시 사양한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두 번의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이 죽었고 논밭은 황폐화 되었다. 나라는 여전히 시끄러웠고 나라는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흔들렸다.“아, 누가 이 나라를 붙들어 세울 수 있는가. 누가 상처투성이 백성들을 살려낼 수 있는가” 강항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임진 정유년 침략으로 조선을 유린(蹂躪)하고 초토화하였으나 끝내 점령하지는 못했다. 


 성웅 이순신장군의 지략과 목숨을 바친 투혼으로 일본을 물리쳤다. 그러나 조선의 강토는 초토화되고 수많은 백성이 죽고 육신이 온전한 백성이 드물었다. 일본도 7년간의 무모한 전쟁으로 국력은 크게 소진되었다. 그러나 강항은 일본이 국력을 회복하면 다시 기필코 쳐들어올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그래서 일본에 피로(被擄)되어서도 훗날의 재침에 대비하도록 일본의 지리와 산업, 제도 등 모든 것을 기록하여 몰래 조선 조정에 목숨을 걸고 적중봉서를 보냈던 것이다. 강항은 포로의 신분이면서도 일본의 최고 학자 순수좌 등 고승들에게 신유학을 보급하고 가르쳤다. 


 그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최고의 승려들을 통해 길(정치)을 물었다. 토요토미는 무력을 과시하는 무단정치를 신봉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는 고승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대학을 배우는 등 예(禮)와 문(文)을 숭상하는 도덕정치로 통치 방향을 바꿨다. 

 그 결과 일본은 임진, 정유년의 침략 이후 300년 간 조선을 침략질을 하지 않고 문화 융성기에 들어간다. 거기에는 강항이 가르친 순수좌의 가르침이 큰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이순신은 칼로 나라를 지켰고 강항은 붓으로 나라를 지켰으며 강항은 여기에 하나를 더해 일본인을 가르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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