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 강항

수은 강항선생의 정신을 계승하자

수은의 생애

강항 선생은 호가 수은(睡隱)으로 불갑면 유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 총명이 남달랐다고 전한다. 5세 때 전라감사 신응시가 그의 재주를 시험하기 위해 다리 각(脚)자로 명제를 하자 즉석에서 「脚到萬里心敎脚- 다리가 만리를 가지만 마음이 가르친 것」이라고 응수하여 전라감사를 경탄케 하였다.
또한 7세 때에는 책장수의 맹자 한질을 즉석에서 암송함으로서 책장수가 천재라 하여 맹자 한질을 주려고 했지만 받지 않자 정자나무에 걸어놓고 갔다. 후에 그곳에 맹자정 기적비를 건립하여 기념하고 있다.
강항선생은 정유재란 당시 형조좌랑이었다. 휴가를 받아 영광에 내려 온 사이 왜란이 발발하자 곧바로 남원의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휘하에 들어가 군량미를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남원성이 함락되자 영광으로 돌아와 김상준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아 고경명 장군의 휘하로 가려 했으나 영광이 함락되자 군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이순신장군의 휘하로 가기 위해 논잠포(염산)에서 배를 탔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왜군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강항의 처는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하고 아들도 물에 빠져 죽었다, 강항과 남은 식솔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면서 한시도 그냥 보내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적정과 지리를 살피고 문물과 풍토, 관직, 적정의 강약 등을 유심히 살펴 몰래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을 귀국하는 김석복과 명나라 사신 왕건공 등을 통하여 조정에 전달했다. 이른바 적중봉소(敵中奉疏)이다. 적중봉소를 보면 그의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다.
선비로서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고 어떻게 하던지 왜란을 극복토록 하겠다는 충성심이 짙게 배어있다.
그는 체류 중에 일본인 승려 호소와라 세이카(藤原 醒호)와 아카마스(赤松廣通) 등에게 주자학을 전수하여 일본 주자학의 비조가 되었다. 그는 체류 4년 만에 승려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고국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선조 임금을 뵙고 일본의 적정을 자세히 보고했다.
선조는 위로와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후일을 기약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고 향리에 묻혀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姜沆:日本儒学(朱子学)の父 藤原惺窩との縁 姜沆は比較的自由な捕虜生活を送っていたが、当時の日本社会に同化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 彼は自分の節度を曲げずに、国に帰るという一念で日本語の勉強も一切していなかったという。 しかし壬辰倭乱(文禄の役)の前、日本に訪れた朝鮮の使臣を通じて、若干朱子学に接していた 僧侶藤原惺窩(1561-1619)との出会いがそれまでの姜沆を変えることとなる。 藤原惺窩は日本にまだ普及していなかった朱子学をより深く学ぶため、当時藤堂高虎によって大洲から 京都の伏見城に移されていた姜沆を訪れて行った。その時、朱子学の勉強のために僧衣まで脱いで、 正装した藤原の学問に対する姿勢に、姜沆は大きく感動されたという。そのことがきっかけとなり、 姜沆は藤原惺窩に四書五経など朱子学を教え、日本に朱子学つまり儒学が定着できる基礎を築き上げた。 そして1598年豊臣秀吉の死後、徳川家康は日本天下の統一と同時に江戸に幕府を開き、 戦争で混乱していた社会の安定のため、新しい時代の政治理念とし価値観として儒学を受け入れる。 それは当時の支配階級のイデオロギーに大きな影響を及ぼし、後には朱子学を教える学校(寺小屋: 江戸時代の庶民のための初等教育機関)もできたという。このように日本社会に朱子学の根を下ろしたのが 藤原惺窩だとしたら、その根が下りるように種を蒔いてくれたのは、姜沆であるといえるだろう。 400年が過ぎた今でも、愛媛県大洲の人々に、姜沆が日本朱子学の父と呼ばれているのもそのためである。

睡隱 姜沆先生 年譜

수은 강항선생 연보

명종22년 1567년 정묘(1세)
5월 17일, 영광 불갑 유봉리에서 몽오(夢梧) 강극검공(姜克儉公)과 모친 영동 김씨(화순)의 5남 1녀 중 중 넷째로 태어나다.
선조 4년 1570년 경오(4세)
백형 해(瀣)<저어당 이이 율곡선생 문인>에게 수학하다.
선조 5년 1571년 신미(5세)
전라감사 신응시가 각(脚)자로 작문 운을 주자 <각도만리심교각(脚到萬里心敎脚)>이라고 응하자 탄복 하였다.
선조 7년 1573년 계유(7세)
맹자 1질을 한나절에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함에 책장수가 천재라 탄복하고 책을 그냥 주자 사양하니 정자의 나무에 걸어 놓고 떠나 맹자정이라 함. 현재 불갑면소재지에 맹자정기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 근처를 맹자마을이라 칭함.
선조 8년 1574년 갑술(8세)
중국고서 통감감목을 하룻밤 새에 통달하여 고창군 아산면 칠암(칠암마을)고을에 강목촌(강목마을)이 생겨나고 현재 전해내려오고 있음.
선조 9년 1575년 을해(9세)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지었다.
(어릴 때 습성을 익혀두면 천성과 같이 된다는 내용)
선조 10년 1576년(10세)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예와 경학을 터득함.
선조 14년 1580년 경진(14세)
모친 김씨 상을 당하여 禮(예)를 갖춰 정성을 다하다.
선조 15년 1581년 임오(15세)
母親喪(모친상)을 마치고 책문(策文)으로 향시(鄕試)에 합격하다.
선조 15년 1583년(17세)
향시에 합격(초시)
선조 21년 1587년 정해(21세)
진사시 삼장(三場)에 모두 합격하다.
선조 22년 1588년 무자(22세)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다.
⦁관례를 하고 참봉(參奉) 김봉(金琫)의 딸 전주김씨와 혼인하다.
선조 25년 1591년 신묘(25세)
백형 저어당이 신묘사화로 화를 당하다.
선조 26년 1592년 임진(26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워 군량과 군기를 모아 의병장 제봉 고경명에게 보내다. 영광 임진 수성활동에 장문서로 참여하고 의병활동하다.
선조 27년 1593년 계사(27세)
광해군이 진주의 분조(分朝)에서 시행한 정시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하다. <김신국, 김홍우, 이진선 등 9명이 뽑히다. >
⦁소금과 절인고기 등 어염을 유통하고 백미 100석을 모아 사촌동생 만은공 강낙으로 하여금 고경명, 김천일, 최경장 의병소에 보내주다.
선조 28년 1594년 갑오(28세)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교서관(校書館)에 분관되다.
⦁우계선생의 문호가 쓸쓸하니 멀리 찾아가 뵈다.
⦁겨울, 기주관(記注官)으로 경연에 입시하다.
선조 29년 1595년 을미(29세)
문한(文翰)을 잘 처리하여 선조의 칭찬을 받다.
⦁성균관 박사가 되다.
선조 30년 1596년 병신(30세)
성균관 전적이 되다.
⦁가을에 병조, 공조좌랑을 거쳐 겨울에 형조좌랑이 되다.
선조 31년 1597년 정유(31세)
이른 봄, 휴가를 얻어 귀근하다가 5월에 분호조 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에 임명됨.
⦁여름,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을 모집하다가 남원(南原) 함락되자 영광(靈光)으로 되돌아오다.
⦁영광(靈光)에서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다.
⦁염산 논잠포에서 9월 23일 왜적이 영광(靈光)으로 돌아오자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이순신장군 휘하로 드어가려고 떠나다가 영광 서북해안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다.
⦁아들 용, 애생이와 조카 등 어린아이들 6명중 4명을 바다에 수장 당하고 1명의 조카아이를 왜놈 땅에서 병으로 잃다.
선조 32년 1598년 무술(32세)
5월, 배를 빌려 탈출하던 도중 판도현(板島縣)을 지나다가 성문(城門)에 조선 침략을 비난하는 글을 써 붙이다. 3일 만에 좌도(佐渡)의 부하에게 붙
잡혀 대진성(大津城)으로 되돌아오다.
⦁왜승 호인(好人)에게서 일본의 방여(方輿), 직관(職官)을 묻고 좌도가(佐渡家)에 소장되어 있던 <왜국지도(倭國地圖)>를 베끼어 기록해두고, 아울러 적정(敵情)과 방략(方畧)을 적어 김석복(蔚山人, 金石福)에게 조정에 소를 올려주도록 부탁하다.
⦁6월, 대판성(大阪城)으로 옮기다.
⦁7월, 대판(大阪)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새 도읍지인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기다.
선조 33년 1599년 기해(33세)
적중봉서를 중국(명나라)의 차관 왕건공(王建功)과 신정남에게 초소(草疏)를 주어 본조(本朝)에 보내게 하다.
⦁피노 중 강항 휘초 16종을 필사하여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 순수좌(등원성와)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아까마쓰 히로미치에게 조선 주자학을 전수하다. 4서 5경을 포함해 16종 21책을 필사해 발문하다
선조 34년 1600년 경자(34세)
봄, 좌도(佐渡)에게 귀국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다. 왜승 경안(慶安)이 극력 권하여 허락을 받아 대마도를 거쳐 거제도 장문포(장목) 5월 19일 귀국하게 된다.
⦁선조의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로 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과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를 올리니 말 한 필을 하사받고 고향으로 내려오다. 건거록을 완성하다.
선조34 1601 신축 萬曆29 35 李德馨이 嶺南에 開府하여 倭의 사정을 묻자〈禮部絶倭書〉를 지어 올리다.
⦁당시 등용을 조정에서 권했으나 스스로 罪人(죄인)이라 칭하고 9월 고향 영광(靈光)으로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고 후학양성에만 힘쓰다.
선조 35년 1601년 신축(35세)
좌의정 이덕형이 영남(嶺南)에 개부(開府)하여 왜(倭)의 사정을 묻자 예부절왜서(禮部絶倭書)를 지어 올리다. 가을에 운제마을로 거처를 옮겨 후학양성을 위해 운제서당을 열고 강학을 시작하다.
선조 36년 1602년 임인(36세)
대구향교 교수(敎授)에 서용되었으나 바로 사직하고 돌아오다.
선조 37년 1603년 (37세)
강감회요를 완성하다.17권 30책.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강항(姜沆) 엮음. 주희(朱熹)가 지은 강목(綱目)을 보완하여 엮은 책. 현종(顯宗) 8년(1667)에 그 아들 시만(時萬)이 간행하였다.
선조 39년 1605년 (39세)
불갑사중수문을 지음, 문선찬주 권선문 완성함.
선조 40년 1606년 병인(40세)
회답사 여우길回答使 呂祐吉이 일본에서 돌아와 倭人들이 공의 충의와 절개를 칭송한다며, 중국의 소무나 문천상 같다고 칭송한다며 東槎錄에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북인(北人)들이 꺼리어 등용하지 않다.
<여우길의 보고서에 있음> 김천일장군 행장을 지음.
선조 42년 1608년 무신(42세)
순천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않음. 선조가 승하하자 방상(方喪) 3년을 입고 동양 최대의 장편시 원가행(怨歌行)을 지어 조상하다.
광해군 2년 1610년 경술(44세)
팔송 윤황(尹煌)이 영광군수로 부임한 뒤 아들 윤순거(尹舜擧) 형제를 보내 수학(受學)하게 하다.
⦁광주향교 중건 상량문을 짓다.
광해군 4년 1612년 임자(46세)
절강총병이 조선의 경전지방에 왜인이 잡서(雜棲)한다 하여 지휘사 황분이 왔는데 이를 변무하다. 무안 화설당의 기문을 지음
광해군 7년 1615년 경술(49세)
부친 몽오공(夢梧公)극검 상을 당하여 형제들과 3년 시묘살이에 들어가다.
광해군 10년 1618년 무오(52세)
5월 6일, 병으로 졸하다.
⦁11월, 불갑산(佛甲山)에 장사지내다.
⦁일주일도 안 되어 이조이 부인 복띠로 자진하다.(영광군지 참조)